2016212006 최근암
#1
얼마 전, 청송관에 허연 눈이 내렸다.
눈이 쌓이고 녹아내리는 걸 볼때마다, 나는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다시금 상기하곤 한다.
그에 따라, 나도 마치 눈처럼 학교에 내 얼굴들이 쌓여왔던 장소들로부터
녹아내려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추억을 다시 꺼내 생각한다.
처음 학교를 왔을 때 알 수 없게 고양되었던 신입생의 기분이 이젠 어린 새내기들의 모임에서 나오는 열기로 만족하게 되었고, 언제나 함께 할 것 같았던 선배와 친구들이 이젠 적적히 안부인사가 오거나 사라지는 것을 이제는 담담하게 받아드리게 되었다.
어느때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으니 학교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감에 따라, 나와 비슷하게 늙은 건물들에게서 오랜 사람들은 점점 떠나가고 있지만 그와 다르게 새로운 역사들과 함께 하는 정겨운 사물들이 있어 안도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저마다 사람들이 새겨진 특별한 이야기들은 기억하는 사람들이 차차 떠나거나 들을 계기가 없으니 새로 오는 어린 양들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건물 주위를 도는 오랜 친구들의 숨결이 붉은 벽돌을 아직도 어루만지어 주는데 말이다.
#2
청송관 옆의 눅눅한 들판이 이젠 칙칙한 주차장이 된 것을 보면서, 우리의 케케묵은 사물들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어른들에 의해 영원히 남겨지지 않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적당한 충격을 주기 충분한 사건이었다.
언젠가 학교를 온 졸업생들이 ‘이제는 여기도 변했다’는 말이 나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그들과 학교가 유대하는 것은 그 조그마한 졸업장이라는 ‘종이 영수증’이 아니라, 살아왔던 터전의 것들임을 알기에
그들의 무의식적인 상실감에 공감할 수 있었다.
대학이란 본질은 장소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지만, 자기가 알던 장소가 바뀌었을 때 드는 섭섭한 감정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함께한 역사는 대학교라는 장소, 실존하는 영역이었고, 우리가 아는 대학교라는 가치의 본질은 실존보다 뒤에 있어서 살피는 이가 적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
그렇지만, 모든 사물들을 전통으로 내세워 오랜 불편함과 눅눅함이 쌓인 것들을 계속 안고 가야 한다는 말이 당연하게 강요될 수는 없다. 장소는 다양한 사람들의 인식에 의해 천천히라도 바뀔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서운하게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운명을 담담히 받아드리는 사물들의 모습을 우리는 되도록 오래 기억해줘야 한다. 지금의 새 사람들과 오래 된 우리가 나눌 수 있는 가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그렇기에, 바뀌기 전의 사물들의 이야기를 언젠가 누군가 알 수 있도록, 그 오랫동안 함께한 기억을 기록해야 할 의무가 생기곤 한다.
그 책임이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고 나는 사라지는 물건들 중, 안면이 좀 트여 있는 청송관 뒤뜰에 있던 낡아가던 자리’의 역사를 남기고자 한다.
#4
지금도 담배 피는 사람들을 찾으려면 가장 먼저 살펴보는 청송관 뒤편의 낡은 장소는 지금은 ‘정자’라고 불려오지만 2006년에는 그네였다. 그러한 사실을 아는 이는 이젠 그렇게 많지는 않다.
(사진 첨부2 -그네와 사람)
그네를 만든 사람은 마찬가지로 담배 피우는 것을 좋아하는 이병종 교수님이 자신의 수업 ‘재료구조실습’을 수강하는 학생들과 함께 만들어 낸 곳이라고 전해진다. 텅 비어 있는 청송관 뒤편에 당시에도 담배피는 사람들이 몰리는 곳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몰렸을 것이다) 그 텅 빈 장소에 어떠한 물건을 세우고 싶다는 정신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 같다.
지금이야 만들라고 하면 학생들은 볼 맨 얼굴을 마주하는 뿐만 아니라, 학부모의 성난 얼굴을 마주할 일이 될 수도 있지만, 결과물에 대하여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었던 것처럼 보인다. 자기손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쾌감은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들더라도 보람이 있다.
#5
하지만, 어쩌면 당연하게도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주로 청송관을 같이 쓰는 인문계 교수님들이었는데, 이 뒷전에 터전 잡은 ’디자인과 전용 놀이터’가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불만은 점차 누적되었고, 결국 디자인과가 아니라 모두가 쓸 수 있는 ‘쉼터’의 성격을 지닐 수 있도록 장소가 개조되었다.
(사진 첨부1 -최초의 그네)
2010년에 그 쉼터 마저도 사람들이 불만이 있었는지, 혹은 수업의 일환으로 더 개조가 필요했는지 모르지만, ‘재료구조실습’ 수업의 일환으로 대형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정자’의 모습이 되었다.
(사진 첨부4 -정자 작업과정)
(사진 첨부3 -당시 작업 팀)
지금의 수업에서는 할 수 없는 굉장한 노동이 집중된 작업이다. 작업 과정에 가져온 자재들은 당연하겠지만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단단한 느낌을 준다. 저 단단한 것들을 옮기는 것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고, 안전장치 없이 했으므로 위험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별 문제없이 잘 수행했다는 것은 그들이 협력적으로 함께 수행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완성하고 나서 선배들의 얼굴에서 피곤함이 느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닐 듯하다. 내가 해냈다는 뿌듯함과 노곤함이 공존하는 모양새다. 저 당시가 아니라면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디자인은 한국식 정자와는 다른 느낌인데, 일본식 처마양식과 혼재된 양식으로 기억하고 있다. (확인 필요함) 전통가옥을 전공한 사람들이 와서 봤을 때 당혹감을 표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6
(사진 첨부5 -완성된 정자)
(사진 첨부6 -태양광 설치)
사실 기능적인 요소들을 고려해서 지어진 것인데, 자연환경을 고려해서 처마는 비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앞서 만든 ‘쉼터’의 터전을 다 바꿀 수는 없으니 지금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당시에는 창문도 있어서 안에서 자고 갈 수도 있었고, 심지어 태양광을 설치하여 하루 종일 지낼 수도 있었다.
(채승진 교수님이 가끔 자랑하시곤 했다) 또한, 사람들끼리 간단한 행사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아니지만 말이다.
(사진 첨부7 -노후화된 정자)
우리에게 ‘정자’라는 곳은 어쩌면 가깝지만 먼 삼촌처럼, 가끔 만나면 용돈을 안주는 건 매한가지지만 막상 함께 있어야 할 자리에 없으면 섭섭한 존재가 되어갔다. ‘가족’이란 정신적 테두리 안에 있는 친숙하지만 동시에 거리가 먼 존재와도 같다. 그럴수록 가까이 다가가야 하는데 말이다.
오랫동안 뒤뜰을 주름잡던 정자는 태풍으로 몸을 감싸던 창문이 날라간 것을 시작으로, 정자는 관리가 되지 못해 점차 파손되고 상하기 시작하여 그 빛을 잃어 갔으며, 점차 낡고 황폐하게 되어갔다.
#7
2022년 2월, 나는 이때 ‘정자’와 안면을 트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월 방학 중 이병종 교수님 주최로 시작된 스터디 모임에서 사람들이 선별되었다. ‘노후화된 정자’를 보수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채승진 교수님은 농담삼아 이것을 “이병종 교수가 싼 Big Shit”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사진 첨부8 -보수공사 과정)
(사진 첨부9 -당시 작업 팀)
그렇게 나를 포함해 6명의 학생, 최근암, 이재황, 이강현, 이민호, 박준호, 이우철이 선별되었고, 채승진 교수님과 함께 작업을 진행하였다. 목적은 노후화된 정자의 지붕 강화였고, 양철판을 통해 보강하는 것이 그 계획이었다.
하루만에 해야만 했는데, 날씨는 춥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교수님과 같이 일찍 철물점에 들러 양철판을 차 지붕위에 얹혀서 가져가야만 했다.그 다음, 모두 474호에 모여서 교수님이 준비한 빵과 음료를 마시면서 교수님의 계획을 확인하였는데, 과정은 학교에 있는 물건들을 조합하여 사다리와 작업대를 만들어 양철판을 잘라 올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업이 학생들 모두 처음이었지만, 다들 혹시나 발생할 안전 사고에 대해서 조심하여 잘 마무리했다고 회상한다.
그중 민호의 노력이 굉장했는데, 대부분의 작업을 도맡아 작업하였다. 거기에 교수님이 솔선수범하여 활동하여 예상된 시간에 잘 마무리되었다. 아쉽게도 교수님은 본인이 가져오신 캠핑용 의자에 앉아 우리가 작업하는 것을 느긋하게 관망할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도 뿌듯함과 노곤함이지만, 현장의 기억을 되짚어보자면 뿌듯함이 더 컸다.
#8
(사진 첨부10 -지금의 정자)
이후, 추가로 보수 공사를 한 번 더 거쳐서 지금 학교를 가면 볼 수 있는 정자의 모습이 되었다.
좀 말끔 해진 뒤뜰의 터줏대감을 보는 게 좋은 이유는 나도 이 정자에 새긴 또 하나의 낙서이고 함께 작업했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곁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젠가 학교를 떠날 사람이기에 떠났던 혹은 떠나는 졸업생들이 학교의 변하거나 변해 있을까봐 서운하거나 걱정하는 걸 더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나도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어린 날과 함께한 곳이 변하는 건 언제나 묘한 기분을 주곤 하기 때문에
뭐, 그런 들 어떠하랴.
정자가 우리에게 주었던 본질은 쉴 수 있는 쉼터이지만, 그 뒤에는 함께 놀 수 있는 놀이터였고, 그 뒤에는 함께 활동하고자 하는 스승과 제자가 가진 유대감이 있으니, 언젠가 사물이 사라지더라도 각자의 기억속이나 지금 남기는 기록속에서 산업디자인과가 가진 특유의 장점, 유대감이 이어진다면 괜찮지 않을까도 싶다.
결국 대학교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본질이듯이, 우리가 이러한 가치를 기억하고 기록한다면 더 오래오래 새내기들과 설령 세대가 차이 나더라도 나눌 수 있는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정자라는 공간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나눠 주었던 가치인 ‘디자이너들의 놀이터’에 맞는 함께하는 자세일 테니까 말이다.